.

The hottest places in hell are reserved for those who,

in a period of moral crisis, maintained their neutrality.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를 위해 예비되어 있다.

 

-단테, 「신곡」

by Lasse | 2008/07/10 01:44 | 트랙백 | 덧글(2)

(펌) 진중권 글을 우석훈이 퍼온 것을 불펌;

붉은 색이 우석훈이 쓴 글, 그 아래가 진중권이 쓴 글.

나는 어지간해서 퍼오는 것은 안하는데, 이 글은 내가 본 진중권 중에서 최고의 글이다. (진중권의 글을 펌질하는 것은, 이번이 태어나서 처음이다.)

이런 글 쓸 수 있는 사람, 좌파 중에서는 진중권 밖에는 없어 보인다. 그가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미덕을 추가로 갖추기 시작했다. 눈부시다.

우파 중에는? 불행히도 당분간은 없을 것이다.

우파들, 글 좀 써라. 짐승의 소리로, 포효하지 말고. (니들도 토론 프로 좀 봐라, 이게 사람이냐, 짐승이냐? 인간의 말로 얘기해라!)

거리의 영웅, 진중권이 한꺼풀 또 벗었다. 업그레이드 진중권, 그리고 내 이해가 맞다면, 그는 몇 번 더 업그레이드 할 것 같다.

놀랍다.


진중권 - 촛불집회에 관한 단상

이제까지는 현장 리포터로 상황을 따라가는 데에 주력했기에, 몰려드는 모든 방송, 신문, 잡지 인터뷰들을 다 끊고 견해 표명을 삼가왔습니다. 사실 저는 리포터에 불과하고, 촛불집회는 대중의 반란이자 축제이기 때문에 제가 이리로 가자, 저리로 가자 훈수를 두는 게 주제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개인이 촛불정국에서 필요이상으로 부각되는 데에 대한 우려도 있었구요. 이제는 리포터이자 동시에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참가자의 입장에서 조심스레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될 때인 것 같습니다.

1.

미국산 쇠고기 문제에 관해서 말하자면, 수입이 일단 재개됐기 때문에 재협상을 요구하는 집회와 별도로 일상적 투쟁을 조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이 제 돈 내고 미국산 쇠고기를 먹겠다는 사람들을 말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선택 또한 존중받아야 하니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원하지 않는데도 미국산 쇠고기를 먹게 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일 겁니다. 말하자면 쇠고기를 사먹을 때, 미국산 쇠고기인줄 모르고 사먹거나, 미국산 쇠고기로 속아서 사먹는 일을 막는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정부가 내다버린 소비자의 선택권을 시민들이 스스로 확보하는 과제지요.

송기호 변호사가 주장한 것처럼 국내산 한우의 전수검사의 도입과 같은 의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소비자 운동의 관점에서는, 비록 쇠고기를 적게 먹더라도 질 좋고 안전하고 건강하게 먹는 쪽으로 발상의 전환을 일으키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어차피 값싼 미국산 쇠고기 먹을 사람들은 대부분 돈 없는 서민일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에서 안전하지 않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은 인격과 인권의 문제입니다. '배부른 소리 한다'는 천박한 생각을 넘어, 식생활의 생태적 전환은 서민의 당당한 권리에 속한다는 인식을 확산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생산자 운동의 관점에서는 몰려드는 미국산 쇠고기에 맞서 한국 축산업의 생태적 전환을 위한 정책적 대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정당과 시민단체에 속한 전문가들이 맡아줘야겠지요. 식량이 자원화, 무기화되는 상황에서 선진국들은 식량자급률을 계속 높여나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값싸지만 그다지 안전하지 못한 외국산 농축산물의 공세에 한국의 농업은 몰락해 가고 있습니다. "농촌에도 CEO가 필요하다" 어쩌구 하는 명박스러움을 넘어, 생태적 전환을 한국 농업의 회생을 위한 계기로 만드는 정책의 생산이 필요합니다. 이는 물론 위의 소비자 운동과 연동되어야겠지요. (이 부분은 저보다 잘 아는 분이 상세히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2.

미 국산 쇠고기 반대운동을 일상적인 농산물 생산과 소비의 생태주의적 전환운동을 승화시키는 것과 더불어, 촛불집회를 어떻게 가져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촛불집회를 계속 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의 비율은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실제로 한겨레 여론조사에 따르면, 문제의식에는 여전히 공감하나, 촛불집회의 계속에는 반대한다고 대답한 수치가 촛불집회를 계속해야 한다는 수치와 엇비슷하게 나옵니다.) 이는 촛불집회를 단순히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언젠가 집회 참가자들이 여론으로부터 고립되어 버릴 것이라는 점을 시사합니다. 종교계의 가세로 촛불집회가 연장이 되긴 했지만, 그 효과는 영속적인 게 아니죠.

게다가 두 달 넘게 촛불집회를 하느라, 시민들이 많이 지치기도 했지요. 이제 촛불집회의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양적 관점에서 질적 관점으로 시각을 전환해야 합니다. 평시에는 참가자의 에너지 소모를 막고, 촛불시위로 불편을 입는 운전자나 주변상인들의 민원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소규모로 준법시위를 벌여야 한다고 봅니다. 집회가 끝나면, 그 동안 집회로 타격을 입었던 음식점에서 뒤풀이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청계광장이든, 시청앞이든, 아주 조그만 문화제 형식으로 촛불시위를 이어나감으로써 '촛불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매번 집회를 할 때마다 뭔가 다른 형식을 선보이는 창의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 러다가 가령 집중집회가 잡혀있는 7월 12일 같은 주말이나, 그 밖에 이 이슈와 관련하여 특별한 계기가 생길 때에는 언제라도 다시 결집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입니다. 청와대로 가기 위해 물리력을 동원하는 것도 좋지만, 청와대 가는 800번 버스를 타고 가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았던 촛불소녀들의 창의력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상상력으로 명박산성을 넘지 않았던가요?

3.

어 차피 반성하지 않는 정권, 앞으로 4년 내내 길 밖으로 쏟아져 나올 일이 계속 터질 것 같다는 예감이야 누구나 갖고 있을 것입니다. 의제의 확산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의제의 확산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제가 촛불집회 처음부터 강조했고, 또 얼마 전에 '아시아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지적했듯이, 촛불집회의 바탕에는 '쇠고기 문제보다 더 깊은 분노'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분노는,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대기업에서 자동차 몇 대 더 파느냐', 아니면 '국민의 생명권을 더 중시하느냐'의 선택지에서 아무 생각 없이 전자를 선택한 정권의 천박한 시장주의 이념에 대한 반감입니다.

이 는 쇠고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들을 인격이 아닌 생산의 투입요소로 보아 소모적인 경쟁(그것도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70년대 방식)으로 몰아넣는 미친 교육, 시민의 건강권과 생명권을 위한 의료의 공공성을 간단히 '산업'의 논리로 무력화시키는 위험한 발상, 시민의 생존권의 영역에 속하는 물과 에너지를 공공재가 아닌 상품으로 팔아먹겠다는 천박한 사고.... 촛불집회는 이 모든 명박스러움에 대한 반발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촛불집회를 통해 확인된 시민의 힘을, 이명박 정권이라는 시장주의 탈레반들과의 싸움에서 사회적 공공성을 수호하기 위한 저항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이명박 정권의 태도로 볼 때, 이 싸움 어차피 다양한 이슈를 놓고 4년 내내 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이를 위해서는 온라인의 네티즌들, 오프라인의 시민단체들, 그리고 야당의 위치에 있는 여러 정당들의 헙력으로, 장기적인 저항의 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를 위해 무슨 국민본부 같은 단체를 결성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오프라인의 구심점 없이 이제까지 촛불집회가 그렇게 진행되어 온 처럼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움직이되, 이제까지와는 다른 뭔가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가미하는 형태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아니면 그것을 뛰어넘는 또 다른 대안이 있을 수도 있겠구요.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가 될지는 네티즌들의 대중지성에 맡겨 보려 합니다.

4.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정권의 방송장악 음모를 저지하는 것이겠지요. 이미 아고라의 일부 네티즌들은 시청에서 KBS, MBC, YTN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의제와 확장은, 누가 지시하거나 명령할 것도 없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조중동을 타격하기 위한 '숙제'를 열심히 하는 것, 경향, 한겨레, 시사IN,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다음과 같은 포털 사이트를 돕는 활동도 이 사회의 언론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일상적 활동이겠지요. 이번에 조중동이 엄청나게 타격을 입기는 한 모양입니다. 다음의 기사를 끊을 정도로 히스테리컬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십시요. ㅋㅋㅋ....

다른 하나는 7월 30일 서울시 교육감 선거입니다. 총선, 대선이 4, 5년 남은 이상, 시민들이 정권을 합법적으로 심판할 유일한 기회입니다. 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이명박 정권의 미친 교육을 심판한다면, 두 달 동안의 촛불집회가 절반의 승리에 그치고 만 데서 비롯된 시민들의 좌절감을 상당 부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4, 5년 동안의 장기전을 위한 자신감을 심어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싸움이지요. 아직 공식적으로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진보신당과 칼라TV의 분위기도 법이 허용하는 한계 내에서 이 싸움을 최대한 도우려 하는 쪽입니다.

다 른 한편, 민주노총, 특히 화물연대나 금속노조의 파업을 통해 촛불과 노동운동 사이의 연대가 확인되었습니다. 물론 노조의 파업에 대한 지지가 얼마나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번 촛불집회가 시민들과 노동자들이 서로 처지를 이해하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아쉬운 게 있다면, 이랜드, 기륭전자, KTX 여승무원 노조와 같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이 촛불 속에 묻혀 버린 것입니다. 이번 촛불집회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같이 참여했다는 점, 잊지 맙시다. 그리고 이들의 처지가 곧 나의 처지요, 우리가 낳은 아이들의 처지입니다. 촛불집회를 통해 얻어진 연대의 정신이 앞으로 계속 이어졌으면 좋겟습니다.

5.

이 모두가 실은 대의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현상입니다. 대의제는 간접 민주주의라, 국민의 의사가 왜곡되는 제도적 한계를 안고 있지요.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국민의 80%가 반대하는 정책을 강행하는 극단성을 보이는 것은 대의제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을 운용하는 가운데 거기에 내재된 위험성을 극단적으로 드러낸 현상이라 봅니다. 국민의 80%라면, 심지어 이명박과 한나라당을 찍었던 사람들마저 배신당했다는 얘기죠. 그것은 대한민국 정당들 중에 제대로 된 놈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한나라당이든, 민주당이든, 민주노동당이든, 창조한국당이든, 아니면 진보신당이든, 자기의 정치적 정체성에 맞는 정당에 가입하셔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셨으면 합니다. 정치에 대한 혐오증이 이명박이라는 혐오스러운 대통령을 낳았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 이 문제, 하루 이틀에 해결될 문제 아닙니다. (이른바 명빠들 중에는 지역감정의 노예가 되어 촛불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전라디언'이라 부르는 저질들이 많더군요. 이 모두가 한국의 정당정치가 얼마나 왜곡됐는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살았다고 우리의 아이들에게까지 이런 후진적 정치를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왜? 이 후진적 정치가 우리 삶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이미 체험해 보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대안은 거리에서 찾아질 수 없습니다. 해결책은 어차피 정책이라는 형태로 수립되고, 법률이라는 형태로 고정되어야 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정당 자체를 바로잡고, 나아가 보수 일색의 정당구조를 바로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아마 몇 십 년 후에 우리의 아이들마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 겁니다.

6.

형식적이긴 하지만 대통령이 두 번 사과를 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만족할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랴부랴 추가협상을 하여 30개월 미만의 쇠고기만 들여온다고 합니다. 촛불에 놀라 정부에서는 수도와 전기, 의료의 민영화는 추진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대운하도 추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물론 벌써부터 딴 소리가 흘러나오지만, 정부에서 공언을 해놓고 나중에 다시 추진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때는 아마 '이명박 퇴진'이라는 구호가 상징적 구호를 넘어 현실적 요구가 될 것입니다. 그때는 정말 이명박씨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운동이 벌어질 것이고, 또 그를 정말로 끌어내릴 겁니다. 절반의 승리라고 할까요?

하지만 촛불이 거둔 성과는 정작 다른 데에 있습니다. 이제까지 정치에 관심 없던 시민들이 드디어 정치가 자신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정당이나 단체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창의성으로 정치의 또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직접 경찰에 맞서다가 위협당하고, 연행 당하고, 폭행당하고, 구속당하면서 시민이 주권을 잃으면 국가권력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는지 생생히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가 자신들의 정치적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절실히 깨닫고, 자신을 정치적 주체로 세워냈습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촛불이 거둔 승리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들은 '냄비'를 얘기합니다. 그런데 어떤 냄비가 두 달을 끓습니까? 나중에는 자기들도 지겨워할 정도로 그만 좀 끓으라고 애원을 하지 않습디까? 촛불집회를 통해 시민들은 쉽게 달아올랐다가 금방 식는 냄비가 아니라, 한번 끓으면 두 달 동안 지글거리는 뚝배기임을 입증해냈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이 진짜 뚝배기가 되려면,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제가 앞에서 말한 일상의 실천 속에서도 열기와 온기를 보존할 때, 그때 시민들은 진정한 뚝배기가 될 것입니다.

스크롤 압박을 주는 긴 글, 읽어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진보신당과 칼라티비는 촛불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 끝까지 동참하고, 수 십 만개의 촛불이 빛나는 영광스러운 순간만이 아니라, 수백 개의 촛불이 권력과 보수언론의 파상공세를 받는 어려울 때에도 촛불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by Lasse | 2008/07/09 13:25 | 사유하기. | 트랙백 | 덧글(0)

종교.

마키아벨리가 말한 것입니다.

종교는 통치에 필요할 뿐 아니라 특히 사악하다고 생각되는 종교를 지지하는 것은 통치자의 의무이다.


의무인가요?
정말 재미있습니다.

by Lasse | 2008/07/03 14:54 | 사유하기. | 트랙백 | 덧글(0)

6월 결산.

 

1. 루시퍼이펙트.

시험기간이라 다 읽지 못하고 두었다가 시험이 끝난 주 주말에 읽어내려간 책입니다.
두께는 상당했으나 그럼에도 상당히 흥미로웠고. 소설과 같았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주제는 무겁지만 그래도 읽을 만한 책입니다.


2. 나는 고발한다.
좋아해서. 자주 읽는 책입니다.
요즘의 사태를 보면서. 그리고 사람들의 서로 다른 대처를 보면서.
또 생각이 났습니다.
이럴때마다 항상 보고 싶어지는 책인 것 같습니다.


3. 애덤 스미스 구하기.
이건. 동생의 독후감을 위해 읽은 책이니 뭐라고 말하기는 그렇습니다만.
소설의 틀에 경제학이 담겨있어 이해는 쉬운 편입니다.
또한 경제학적 설명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도 만족스럽습니다.

그러나..

소설로 풀어쓴 형식의 한계라 할 수 도 있겠지만

단순한 소설로 평가하자면 개연성도 부족하고.

전체적 구성 자체에도 비약도 있으며 좀 전형적입니다.


결국 소설이라 좋지만 너무 소설이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신이 분노하여 야심을 불어넣은 한 빈자의 아들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하고는 곧 부자들의 생활을 동경하게 된다. 아버지의 오두막이 자신의 거처로는 너무 비좁고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한 그는 호화로운 저택에서 좀더 편안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발로 걸어 다녀야 하는 사실에 불만을 느끼며 자기보다 높은 사람들이 마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고는 자기도 그런 마차를 타고 다닐 수 있다면 좀더 편안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 하인들로 이루어진 많은 종자들이 자신을 많은 수고로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이 모든 것들을 얻게 되면 행복감을 느끼면서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러한 행복에 관한 어렴풋한 공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한 삶의 편리함을 얻기 위한 노력이 시작된 첫 해에, 아니 첫 달에, 그는 그러한 편리함의 결여로 인해 겪었을지도 모를 것보다 훨씬 더 큰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불안, 걱정들을 감수한다. 그는 인내를 요하는 어떤 직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뼈 빠지게 일하며 자신이 경멸하는 이들에게조차 알랑거리고 비위를 맞춘다. 그래서 마침내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물질적인 부를 획득한다. 하지만 아주 늙어서 삶을 마감할 때쯤이 되어 육체는 고통과 질병으로 쇠약해지고 그간 겪은 수많은 마음의 상처와 실망의 기억으로 마음이 쓰리고 괴로워지면, 그제야 부와 권세는 하찮은 효용만을 지닌 자질구레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족집게 상자와 마찬가지로 번거롭기만 할 뿐 마음의 평정을 얻는 데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 빈자의 아들 / 애덤 스미스 (도덕 감정론 中)




4.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의 책 중 가장 먼저 읽은 책이기도 하고 가장 좋아하는 책입니다.
아니, 이 정도로는 모자랍니다.
포르투갈 작가의 책 중에서 가장 좋아한다는 말 정도는 해 줘야 하겠습니다.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본성이 여과없이 표출되는 차가운 소설이지만
부정할 수는 없기에 더욱 슬픕니다.

이거 원, 실명은 원래 옮는 것이 아닌데. 죽음도 옮지 않죠, 하지만 우리 모두 죽지 않습니까

 

어제는 우리도 볼 수 있었으나, 오늘은 볼 수 없다, 내일은 다시 볼 수 있겠지. 마지막 말은 약간 물어보는듯한 느낌으로 해야 한다. 막 말을 뱉으려는 순간,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는 신중한 태도 때문에, 희망 섞인 결론에 약간의 의심을 덧붙이는 것처럼.

 

아가씨가 부모님을 만났을 때는 둘 다 눈도 멀고 감정도 멀었을 거야, 우리가 전에 지니고 살았던 감정, 과거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규정하던 감정은 우리가 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눈이 없으면 감정도 다른 것이 되어버려, 어떻게 그렇게 될지는 모르고, 다른 무엇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가씨는 우리가 눈이 멀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말했는데, 바로 그게 그 얘기야. 선생님을 사랑하시나요. 응,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하지만 만에 하나 내가 눈이 먼다면, 내가 눈이 먼 다음에 다른 사람이 된다면, 무슨 감정으로 사랑을 할까. 전에 우리가 볼 수 있었을 때도 눈이 먼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지금과 비교하면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지, 일반적인 감정은 볼 수 있는 사람의 감정이었고, 따라서 눈먼 사람들도 눈먼 사람들의 감정이 아니라 성한 사람들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어, 그런데 이제 눈먼 사람들의 진짜 감정들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어, 아직도 시작일 뿐이야, 지금은 그래도 우리가 가졌던 감정에 대한 기억에 의존해 살고 있잖아, 지금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아는 데는 눈이 필요 없어, 과거에 누가 나더러 언젠가 사람을 죽일 것이라고 말했다면, 나는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였을 거야, 하지만 나는 이미 사람을 죽였어.



5.그라운드 제로.
레제 드라마- 라는 특이한 형식입니다.
좋아하지 않는 장르이지만 최근 관심을 가지고 읽고 있는 복거일 작품이라서 읽었습니다.

작가 후기의 설명에 의하면.

정치적 현실이 정통적 사실주의로 다루기엔 너무 사악하거나 위협적일 때, 현실을 총체적으로 그리기를 열망하는 작가는 비정통적 방식을 고르도록 몰린다.  

라고 하니.

 

결국. 이 작품은

"현실이 예술가의 상상력을 압도할 때, 예술은 어떤 모습을 해야 하는가?" 에 대한 작가의 훌륭한 답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보기에도 이건 소설이라기보다.

반정부적 입장에서 서술한 역사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니.

모두 독재를 비난한다. 독재자들까지. 자신을 독재자라 일컬은 독재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독재는 인간 사회의 보편적 특질이다. 작은 기업에서 거대한 정부에 이르기까지, 위계 조직(hierarchy)을 지닌 집단들은 모두 독재자가 지배한다.
기업의 대표이사에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무슨 이름을 지녔든 그리고 이론적으로는 어찌 되었든, 조직을 실제로 이끄는 것은 늘 하나의 독재자다. 독재자와 위계 조직은 사회적 정보 처리의 진화가 마지막에 갖춘 모습들이다. 그 모습들은 이념과 역사적 상황을 넘어서는 보편적 현상이다.
이처럼 독재는 이제는 잊혀진 선조들로부터 인간이 물려받은 특질이다. 집단을 이루어서 사는 모든 고등 동물들은 우두머리 수컷의 독재적 지배를 통해 질서를 유지한다. 인간의 선조들도 물론 그러했다. 독재가 인간에게 그리도 자연스러운 까닭이 바로 거기 있다.
 
사람에게 '우아한 아부'보다 더 중요한 기술은 없다. 절대적 독재자의 궁정에선 특히.
 
독재가 그리도 자연스러우므로, 절대적 독재자의 출현을 막으려는 인간의 용감한 시도들은 자주 실패한다. 놀라운 것은 그런 시도들이 자주 실패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들이 자주 성공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그리도 미묘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는 '기억의 비대칭성(asymmetry of memory)'이다. 도움을 준 사람과 도움을 받은 사람은 그 일에 대해 서로 다른 기억을 지닌다. 도움을 준 사람은 그것을 오래 기억하고 즐겁게 떠올리지만, 도움을 받은 사람은 그것을 이내 잊거나 깎아내리거나 속으로 불쾌하게 여긴다. 이 세상에서 큰 은혜를 베푸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도 드물다,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유화정책은 보기보다 위험하다. 그것은 전쟁의 위험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리다. 자신의 공격적 자세가 상대방의 양보를 불러오면, 공격적 자세를 취한 쪽은 한 걸음 더 나아가도 상대방이 물러나리라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마침내 더 물러날 수 없는 데로 상대방을 밀어붙이게 된다.
 
 
누구도 자족한 섬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대륙의 한 조각, 큰 덩치의 한 부분이다. 만일 흙덩이 하나가 바닷물에 씻겨나간다면, 유럽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마치 갑(岬)이 씻겨나간 것처럼, 마치 그대 친구의 또는 그대 자신의 집이 씻겨나간 것처럼: 내가 인류에 연관되었으므로,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작게 만드느니, 결코 사람을 보내지 말아라,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알아보라고; 그것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

 

 

삶의 상수는 자기이익이다. 자연히, 민족주의는 정치의 상수다. 민족주의는 큰 글씨로 쓴 자기이익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는 민족주의를 자신들의 이익에 맞도록 조작한 정치가들에 의해 다듬어졌다.


6.헌법에 비친 역사.

촛불 문화제 이후 시민 불복종과 여러가지 해서 법 분야에 관심이 생기기에 본 책입니다.
우리 나라 헌법의 불합리성을 생각하게 되어 좀 슬펐습니다.


7. 톰킨스, 물리열차를 타다
이제는 오히려 이과 책이 더 읽기 힘들어졌습니다.
조지 가모브, 물리열차를 타다. 의 개정판인데
읽으면서 이과 책을 안 읽게 된 자신을 좀 반성했습니다.


8.새빨간 미술의 고백
그림 그리는 것, 창작 활동을 하는 것에는 흥미가 없으나
이런 종류의 작품 감상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역시 책보다는 실제로 보고싶습니다.


9.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너에게 붙여진 이름은 알아도 네가 가진 이름은 알지 못한다..

 

눈먼자 들의 도시 이후에 읽은 모든 사라마구의 소설이 그랬듯이..

약하다- 는 생각에 책 자체의 수준과 상관없이 만족이 힘들었습니다.

문장에 흡입력도 있고, 늘어질 지도 모르는 내용이 잘 넘어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입 정도는 떨어지는 듯- 합니다.

그러나.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이기는 합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무엇으로 남을까요. 나는 누구에게, 어떻게 기억될까요..
씁슬한 질문입니다.
 

10. 세계사 편력1

민족의 역사에는 세 단계가 있다. 처음에는 성공하고, 그러면 곧 거드름을 피우고 다른 민족을 압제하게 되며, 그리고는 마침내 몰락한다. - 헤로도투스

 

역사 역시 오랜만이라 읽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을 하나하나 편지로 받았다면 훨씬 흥미롭게 읽었겠지요.. 부러웠습니다.
여태 읽은 대부분의 세계사 책과 다르게
인도를 비롯하여 서아시아에 상당한 비중이 있어 생소하면서도 읽을만했습니다.
2,3 권도 읽을 예정입니다만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

by Lasse | 2008/07/03 14:50 | 읽어내리기. | 트랙백 | 덧글(0)

결국에는.

대학생- 이라는 집단에 속하여 당연하다는 듯이 싸이월드.를 사용하고 있으나.
내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들어오지 않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

상대의 기대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인지.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인지.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이든. 더 가까워지지 않기 위해서이든
결국은 온전한 이 들끓음을 쏟아내두지는 못하겠었기에.



이 곳은 가끔 표류하듯 들리는 이들을 제외하면 오롯한 저 자신의 공간이 될 것이고
그 안에서 더 성장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결국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지 않나 싶습니다만.

by Lasse | 2008/07/03 14:22 | 흘러내리듯.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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